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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人사이트] 77세 이연재 어르신 ‘20년 1급 중증장애인 돌보는 숭고한 삶’

하반신 마비 중증장애인 식사부터 대소변까지 돌봐
지인부탁으로 돌보게 된 청년, 이젠 아들과 같아
대변 직접 관장하고 파내느라 휘어진 두 손가락
운행 지역 제한, 불편한 교통 약자 차량 ‘얼어죽을 뻔’
활동보조 서비스 밤 10시 이후‧공휴일 ‘수가’ 높아 지원 제한

 

e데일리뉴스 | [평택=강경숙 기자] 77세의 나이. 어찌보면, 만약 아팠다면 다른 사람의 돌봄을 받아야 할 나이다. 다행히 질병이나 상해로 그렇게 아픈 삶을 살진 않고 있다. 오히려 20여년전부터 지금까지 1급 중증장애인을 돌보는 삶을 살고 있다. 처음 이연재(77) 씨의 사연을 들은 기자는 놀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익재 대한노인회 평택시지회장도 마찬가지였고 주변에 그의 얘기를 들은 사람들도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어떤 마음이면 저렇게까지 돌볼 수 있지? 정말 대단하시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들이나 다름없는 하반신 마비 중증장애인, 그나마 오른쪽 손만 좀 사용할 수 있다. 먹는 것부터 시작해 대소변까지, 사람이 해야 하는 모든 일들은 이연재 어르신의 손과 정성뿐 만이 아니라 어르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가능하다. 생활하는데 불편함과 부족함이 없도록. 이런 아들을 20년 가까이 곁에서 돌보며 살아온 그의 삶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다.

 

봉사로 시작된 삶의 궤적

 

서울 사당동에서 결혼 후 부녀회장과 새마을부녀회 활동으로 봉사를 시작했던 이 씨는, 평생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삶’을 가치관, 인생관으로 삼아왔다. 충남 서산에 사는 지인의 부탁으로 한 청년을 맡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당시 그는 병원에 있던 청년을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살며 간병인 교육을 받고 본격적인 돌봄을 시작했다. 청년은 오른손만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지체장애 1급 환자였다. “병원에서 만난 뒤 데리고 와 같이 살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잠깐일 줄 알았는데, 벌써 20년이 되어가네요”

 

 

24시간 케어, 손가락이 휘어버릴 만큼

 

이 씨의 돌봄은 단순한 생활 보조 수준을 훨씬 넘는다. 하반신 마비로 스스로 배변이 어려운 청년을 위해 매일 좌약을 넣고 장갑을 낀 손으로 대변을 파내는 일까지 직접 해왔다. 20년 가까이 이어진 이 과정에서 그의 두 손가락은 굽어버렸다.

 

욕창 소독, 소변줄 관리, 식사 보조, 세탁, 물리치료 동행, 병원 간호까지 그의 하루는 오롯이 청년을 돌보는 삶으로 채워져 있다. 밤낮이 따로 없고, 외출이나 여행도 꿈꾸기 어려운 삶이다. 24시간 내내 옆에 있어야 할 정도니까 말이다. “돌보면서 지금까지 여행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하루만 떨어져도 불안하거든요. 그래서 늘 같이 있었죠”

 

패혈증 등 세 번의 죽음 고비를 넘기며

 

20년 동안 그는 청년의 생명이 위태로웠던 순간을 여러 번 겪었다. 호흡 곤란으로 중환자실에 실려 갔던 때, 패혈증으로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했던 때, 그리고 식사 도중 기도가 막혔던 순간까지—그때마다 그는 기도하며 버텼다.

 

특히 병원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어느 날, 그는 텅 빈 예배당에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잘못 돌봐서 그런 거라면 제 탓입니다. 한 번만 살려주세요” 온 몸과 마음을 다해 간절히 기도했다. 그날 이후 청년의 상태는 기적처럼 호전됐고, 그것이 너무 감사해 매달 받는 장애인 수급비 중 일부를 십일조로 아들과 상의하에 내며 신앙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하나님이 주신 아들, 가족보다 정이 깊어요”

 

청년은 법적 가족은 아니지만, 이 씨는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라 부른다. 주민등록이나 금융 업무를 위해 변호사 사무실에서 위임장을 받아야 할 정도로 법적으로는 남남이지만, 서로의 삶은 이미 한 가족이다.

 

그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패혈증을 비롯해 세 번의 죽을 고비에 놓였었다. 그 때마다 어머니의 간구와 정성, 눈물이 아니었다면 나는 살아나지 못했다. 내가 살아있는 것은 다 어머니 덕이고 그 마음과 정성을 잊을 수 없다”며 너무도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그는 “친자식보다 정이 더 들었지요. 명절이나 간간히 연락이 닿는 자식들 보다, 얘는 24시간 제 곁에 있잖아요. 그래서 전 늘 ‘내가 먼저 죽으면 너는 어떻게 하겠니’ 묻곤 해요” 가장 걱정하는 문제이다. 나이가 있어 ‘아들보다 먼저 가면 누가 돌보나’ 하는.

 

개인의 삶을 포기한 20년

 

이연재 씨의 삶에는 개인적인 시간이나 여유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결혼 초기부터 겪은 형편의 어려움과 여러 가정사로 고통을 겪었던 그는, 돌봄의 삶 속에서 새로운 신앙과 삶의 의미를 찾았다.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마음이 많이 바뀌었어요. 남편 때문에 힘들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 자식을 돌보는 삶이 제 사명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하는 그의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제도에 대한 아쉬움-한계가 있는 교통약자 차량 이용

 

그는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환자를 돌보면서 제도적 지원의 한계를 절감했다. 활동보조 서비스는 밤 10시 이후나 공휴일에는 수가가 높다는 이유로 지원이 제한되고 있다. 행여 서울 병원 진료를 갈라치면 교통 약자 차량은 경기도 외 운행이 어려워 중간 환승을 강요당한다. “그 겨울에 서울 치과를 다녀오다가 모란역에서 얼어 죽을 뻔했어요. 이런 건 정말 개선돼야 해요”라며 돌봄의 어려운 점과 제도적으로 개선되어야 할 문제들을 지목했다.

 

“그냥 봉사하다가 천국에 가고 싶어요”

 

돌봄 급여가 생계에 보탬이 되긴 하지만, 그는 돈 때문에 이 일을 계속해 온 것이 아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제게 맡기신 일이니까요. 봉사하다가, 자녀들의 축복 속에서 아프지 않고 천국 가는 게 제 소원이예요” 그의 이야기를 들은 주변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지금 세상에 저런 사람이 어디 있나. 친자식도 돌보지 않는 세상인데, 다른 사람의 자식을 20년 넘게 돌보다니. 그것도 사지육신 온전치 못한 사람을, 어떤 마음과 생각이면 가능할까”라고.

 

이연재 어르신의 삶은 ‘돌봄’이 단순한 업무나 제도가 아니라는 것을 내재하고 있다. 한 인간의 헌신과 사랑, 하나님의 마음이 더해져 세워져 있음을 보여준다. 제도의 빈틈을 메우는 건 결국 사람의 마음이고 이연재 어른신에게선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얼마나 오래, 얼마나 깊게 이어질 수 있는지를 그는 몸으로, 실천으로 증명해 왔다. 내 자식도 버리는 세상, 그의 숭고한 삶은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모범적 모델이다./kkse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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