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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창간 3주년 기념 특집 칼럼] 예술을 즐길 권리

문화자본의 수도권 집중과 지역 시민의 예술적 소외

신은주(예술가 · 아트컴대표)

 

e데일리뉴스 | 주말이면 미술을 즐기려는 사람들은 서울로 향한다. 전시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다. 지방과 수도권 외곽에 사는 시민들에게 문화생활은 여전히 ‘이동’을 전제로 한다. 나 역시 그렇다. 전시를 보기 위해 서울로 가고, 전시를 하기 위해서도 서울로 간다. 내가 사는 우리 지역에는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미술을 접할 만한 미술관도 없고, 한두 개의 갤러리는 존재하지만 지역 문화 생태계 속에서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단순히 “전시 공간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예술을 경험하고 즐길 기회 자체가 구조적으로 제한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술은 특정 계층의 취미가 아니라 시민의 감각과 사유를 풍요롭게 하는 공공적 경험이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미술은 여전히 서울 중심의 문화자본 속에 갇혀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인간의 취향이 단순한 개인적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 속에서 형성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문화자본’은 예술을 이해하고 향유할 수 있는 능력과 경험이며, ‘아비투스’는 특정 환경 속에서 몸에 배어 형성되는 삶의 감각이다.

 

생각해 보면 미술을 좋아하고 즐기게 되는 과정은 대부분 반복된 노출에서 시작된다. 어릴 적 부모와 함께 미술관을 가고, 친구와 전시를 보러 다니고, 퇴근 후 동네 갤러리에 들르고, 카페처럼 편하게 전시 공간을 드나드는 경험 속에서 예술은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삶의 일부가 된다. 이런 환경에서는 작품을 구매하는 일조차 자연스럽다. 거창한 투자 목적이 아니라, 좋아하는 작가의 작은 그림 한 점을 집 벽에 걸어두고 오래 바라보고 즐기는 문화가 형성된다.

 

하지만 우리 지역의 현실은 다르다. 시민들이 미술을 향유하고 싶어도 갈 공간이 없다. 어디에선가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어도 알아내기 조차 어렵다. 지역 작가를 만날 기회도 적으며, 작품을 구매할 수 있는 시장 역시 거의 형성되어 있지 않다. 지역 미술가 단체들의 정기 발표회는 그저 자기들만의 행사에 그치고 지역주민에게 예술적 소통의 손길을 뻗지 못한다. 결국 시민들은 예술과 멀어지고, 미술은 일부 전문가나 특정 계층의 영역처럼 느껴진다. 이는 시민들의 감수성 부족 때문이 아니다. 경험할 환경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현실이다. 우리 도시의 적지 않은 아이들은 미술 전시관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채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교과서 속 그림 이미지는 보았을지 몰라도, 실제 작품 앞에 서서 색과 질감, 크기와 공간감을 몸으로 경험해 본 적은 거의 없다. 예술은 사진 파일이나 시험 문제가 아니라, 실제 공간 속에서 몸과 감각으로 만나는 경험인데도 말이다.

 

우리는 흔히 예술교육을 “재능 있는 아이들을 위한 특별 활동”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술 경험은 단지 예술가를 만들기 위한 교육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서와 감각, 자기 표현과 타인과의 소통 능력을 키우는 과정이다. 아이들은 예술작품을 보며 자신도 몰랐던 자기 내면의 모습을 발견하고, 서로 다른 시선을 이해하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을 표현하는 법을 배운다. 예술은 정답을 외우는 교육이 아니라,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한다.

 

특히 오늘날처럼 경쟁과 효율 중심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많은 아이들이 성적과 입시에 쫓기며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채 성장한다. 그런 사회에서 예술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회복시키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미술관에서 한 작품 앞에 오래 서 있는 경험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타인의 세계를 상상하고 자기 감정을 들여다보는 훈련이기도 하다.

 

창의성 역시 갑자기 생겨나지 않는다. 반복된 감각 경험과 상상력의 자극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는 흔히 창의적 인재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아이들이 자유롭게 예술을 경험할 환경에는 인색하다. 창의성은 단지 경쟁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이며, 서로 다른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사회적 감수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지역의 문화 인프라 부족은 단순한 문화 서비스의 격차가 아니다. 그것은 결국 교육의 격차이며, 감수성의 격차이고, 시민적 삶의 질의 격차다. 서울의 아이들은 유명 전시를 쉽게 접하고 다양한 예술 프로그램을 경험하지만, 많은 지역의 아이들은 예술을 생활 속 경험으로 만나기 어렵다. 문화자본은 그렇게 세대 간에 다시 재생산된다.

 

오늘날 한국의 미술 정책은 여전히 대규모 행사 중심으로 흐르는 경향이 강하다. 국제 아트페어 유치, 랜드마크형 미술관 건립, 관광 콘텐츠 확대 등은 도시 브랜드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시민들의 일상 속 미술 향유와는 거리가 있다. 화려한 행사 몇 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민이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 안에 작은 전시 공간 하나가 존재하는 일이다. 비싼 블루칩 작품 거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역 작가의 작품 한 점을 시민이 부담 없이 구매할 수 있는 환경이다.

 

예술 생태계는 거대한 이벤트만으로 살아나지 않는다. 오히려 동네의 작은 갤러리, 독립 전시 공간, 지역 작가들의 작업실, 시민 대상 예술 프로그램 같은 미세한 문화 인프라들이 서로 연결될 때 건강한 문화 생태계가 만들어진다. 유럽의 여러 도시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 들르듯 작은 전시 공간을 방문하고, 친구와 차를 마시며 작품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작품 하나를 구매하는 문화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장기간의 정책과 환경, 그리고 반복된 경험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습관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미술시장의 성장만큼이나 문화 향유의 불균형도 커지고 있다. 서울의 대형 아트페어에서는 수십, 수백억 원의 작품 거래가 이루어지지만, 많은 지역 시민들은 평생 동안 미술관 한 번 가까이에서 경험하지 못한다. 미술이 투자 자산으로만 소비되는 사회는 결국 소수의 시장은 성장시킬 수 있어도 시민 전체의 문화적 감수성은 성장시키기 어렵다.

 

문화는 단지 경제적 투자나 소비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감각을 형성하는 일이다. 시민들이 새로운 것을 보고, 낯선 감정을 경험하고, 서로 다른 시선을 이해하는 과정 속에서 사회는 조금 더 섬세해진다. 예술은 삶을 직접적으로 먹여 살리지는 못할지 몰라도, 삶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힘, 삶을 즐길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다.

 

그래서 문화정책은 단지 “얼마나 큰 미술관을 지었는가”보다 “얼마나 많은 시민이 일상적으로 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바뀌어야 한다. 서울의 유명 전시 몇 개보다, 지역의 시민들이 퇴근 후 가볍게 들를 수 있는 전시 공간 하나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언젠가는 미술을 보기 위해 굳이 서울로 가지 않아도 되는 우리 도시가 되기를 바란다. 가족과 친구, 직장 동료와 함께 동네 전시 공간을 자연스럽게 찾고, 마음에 드는 지역 작가의 작은 작품 한 점을 집에 걸어두며 살아가는 문화.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전시 공간을 경험하며 자신의 감정과 상상력을 키워갈 수 있는 사회. 예술이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이 되는 사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건강한 문화국가, 행복한 도시의 출발점인지도 모른다.